굴포천
굴포천 | |
굴포, 원통천, 직포, 대교천, 한내 | |
(지리 유형: 강) | |
나라 | 대한민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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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 인천광역시 · 경기도 |
소속 | 한강 수계 |
발원지 | 만월산 |
- 위치 | 인천광역시 부평구 부평동 |
하구 | 한강 |
- 위치 | 경기도 김포시 고촌읍 전호리 |
길이 | 20.73 km (13 mi)[1] |
면적 | 131.75 km2 (51 sq mi)[1] |
굴포천(掘浦川)은 인천광역시 부평구 부평동 만월산 칠성약수터에서 발원하여 경기도 김포시 고촌읍 전호리에서 한강과 합류하는 하천이다. 부평구청 앞에서 산곡천이 합류하는 지점부터 한강으로 유입되는 지점까지의 구간은 대한민국의 국가하천으로 지정되어 관리된다.[2] 현재는 도시 개발에 의해 복개되거나 직강화된 구간이 많다.
이름
[편집]원래는 발원지인 칠성약수터부터 목수통[주 1]까지를 원통천(圓通川), 목수통에서 현재의 평동 일대까지를 직포천(直浦川), 평동부터 한강까지를 굴포(掘浦)라고 불렀다. 그러나 현재는 이 모든 구간 전체가 ‘굴포천’이라는 이름으로 인식되는 실정이다.[3] ‘굴포’는 ‘흙을 파낸 개울’이라는 뜻이며[4], ‘직포천’은 조선 중종 때에 굴착과 직강화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이름이다.[5]
1698년경의 《부평부읍지》에는 “직포는 도호부의 동쪽 십 리 되는 곳에 있는데, 적유산(狄踰山)에서 나오고 동쪽으로 흘러 양천현 북포로 들어간다.”[주 2], “대교천은 도호부의 동쪽 칠 리 되는 곳에 있는데, 원래 원적산에서 나온다. 북쪽으로 흘러 직포(直浦)라 하고, 김포군을 지날 때 굴포(掘浦)라 하는데, 제법진(濟法津)으로 들어간다.”[주 3], “대교는 도호부의 동쪽 십 리 되는 직포에 있는데, 돌로 홍예(虹霓)다리를 만들었으며, 세 칸이다.”[주 4]라고 기록되어 있다.[6] 직포와 대교천(大橋川)에 관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1530)과 《여지도서》(1700년대)에도 동일한 내용이 있다.[7][8][9] 그 밖에 ‘큰 개울’이라는 의미의 한내로 불리기도 하였다.[10]
1911년경의 《조선지지자료》에는 경기도 부평군 당산면 동양리(현 계양구 동양동) 당미다리ᄀᆡ(堂山橋川), 경기도 부평군 당산면 평리(현 계양구 평동) 웃벌말ᄂᆡ(上野里川), 아레벌말ᄂᆡ(下野里川), 평리ᄀᆡ(坪里川)라는 지명이 기록되어 있다.[11] 이는 지리상 모두 굴포천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조선지지자료》에는 경기도 부평군 동소정면 대정리(大井里, 현 부평구 부평동) 원통ᄂᆡ(圓通川)라는 지명도 적혀 있으며[12], 이는 원통천과 일치한다.
역사
[편집]중세
[편집]순조 때의 문헌인 《만기요람》에 의하면 고려 고종 때, 강화도와 김포 사이의 수로인 손돌목(孫乭項)이 험하여 배가 지나기 어렵자 그곳을 우회하고자 최이(崔怡)가 김포에서 부평을 지나 황해로 바로 이어지는 일종의 운하 건설을 계획하였다.[13][14] 그러나 이 계획은 훗날 원통이고개라 불리게 되는 만월산 기슭의 화강암 암반지대를 굴착할 기술이 부족하여 실패하였다.[4]
조선 중종 때 우의정이던 김안로 역시 한강에서 시작하여 부평 방향으로 40리 가량을 굴착하였으나, 원통이고개에 이르러 실패하여 황해까지 수로를 연결하지는 못하였다.[15][13][14] 이때 “이 고개가 아니면 물길을 낼 수 있었을 텐데 원통하다” 하고 탄식하여 ‘원통이고개’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16] 이후 굴포천은 일제 강점기 초기까지 자유곡류하는 형태를 유지한다.[17]
일제 강점기
[편집]한강과 경인선 소사역(현 부천역), 부평역 사이의 부평평야 일대(부천군 계남면, 부내면, 오정면, 계양면, 김포군 양서면, 고양군 35개 리 일원)는 대체로 논과 초지로 구성된 지역이었다.[18] 이 지역은 굴포천을 막아 공급하는 물 이외에는 수자원이 극히 부족하여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 농사를 의존하였고, 특히 여름에 호우가 오면 한강이 역류하고 하천이 넘쳐 수해를 자주 입었으므로 생산력이 좋지 못하였다.[19] 이에 1922년 5월 2일 설립을 신청하여 1923년 4월 9일 설립된 부평수리조합에서 1923년 4월부터 1925년 3월까지 공사를 진행함으로써, 1941년 기준으로 4,120 정보의 면적이 관개의 수혜를 받게 되었다.[20] 이 사업은 산미증식계획의 일환이면서도, 일본인에게 막대한 이득을 가져오는 사업이었다.[21][22]
공사 내역은 김포군 김포면 신곡리에 배수갑문을 설치하여 한강물을 동부간선수로, 서부간선수로, 그 밖의 배수(排水)용 수로(이상 총 15,758간), 지선 용수로(用水路, 178,804간), 지선 배수로(排水路)로 흐르게 하고, 이와 함께 굴포천을 개수하여(개수 총 5,000간) 배수로로 쓰도록 하는 것이었다.[19] 동부간선수로와 서부간선수로는 한강에서 남쪽 방향으로 0.1퍼밀 기울어져 있어서, 물의 공급이 용이하게 설계되었다.[23] 더불어 이 조합에서는 김포군 양서면 개화리에서 고촌면 전호리까지 이어지는 제방(총 993간)을 새로 짓고, 고촌면 전호리에서 김포면 신곡리까지 이어지는 제방(총 499간)을 개수하였으며, 부평평야를 관통하는 중앙도로를 신설하였다.[24]
조합의 창설은 대체로 부평평야 바깥쪽, 즉 경성과 인천에 사는 일본인 대지주가 주도하였다.[25] 조합을 창설한 주체는 한다 젠시로(半田善四郞), 입송청일(笠松淸一), 스이즈미 미마츠(水津彌三松), 정인섭(鄭寅燮), 중촌복삼랑(中村福三郞), 마츠야마 츠네지로(松山常次郞) 등 6명이다.[26] 한다 젠시로는 관개의 수혜를 받게 된 지역 내 토지를 가장 많이 소유(406정보)한 단일 주체로서, 이미 1918년 2월에 부평과 김포 일대에 한다농장(半田農場)을 설치한 바 있었다.[26] 입송청일은 시흥군 영등포면에 살고 있었으며, 1913년 4월경부터 부천에서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다.[27] 스이즈미 미마츠는 부천군 계남면에 살고 있었으며, 1911년 4월경부터 역시 부천에서 농장을 경영하였다.[27] 정인섭은 김포군 양서면 송정리의 이장이었다.[27]
마츠야마 츠네지로는 경성에 살고 있었으며, 황해사(黃海社)의 사장이면서 부평수리조합의 초대 조합장이었고[27], 제1·제2함안수리조합과 연해(延海)수리조합을 창설하는 데에도 관여한 인물이었다.[28] 마츠야마는 한다 젠시로와 함께 조합 설립 계획을 주도하였으나, 실질적인 조합 창설 단계에 이르자 토목회사인 황해사에 기대어 모든 권리를 장악하였다.[29] 그러나 토목회사가 주도하여 설립된 수리조합은 그 태생상 설계부터 공사까지 단일 토목회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며[28], 따라서 부평수리조합의 관개 사업 역시 부실한 설계와 시공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30] 즉 설립 당시 부평수리조합은 대체로 황해사 계열의 인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120만 원 이상의 규모로 추정되는 이 공사 부정은 공사 청구, 감독, 시행이 모두 이들에 의하여 진행되었다는 구조적 문제로 인하여 빚어졌던 셈이다.[31]
실제로 부평수리조합의 공사가 1925년 3월에 준공되었음에도 그 해 여름에 일대가 수해를 입었으며, 365,850원의 거금을 들여 보수를 완료한 뒤에야 제대로 물 공급을 할 수 있었다.[32] 당시 제방이 무너져 2만6천 여 정보가 물에 잠겼으며, 계양면은 270호 이상이, 부내면은 310호 이상의 가옥이 무너지거나 유실되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33] 이렇듯 부정한 공사가 이루어진 사실은 1927년 7월 20일 마츠야마 등 다섯 명이 경성지방법원에 배임 및 불법행위 혐의로 고소된 후, 동년 8월부터 언론에 보도되면서 널리 알려졌다.[30] 공사가 진행된 실태는 콘크리트 배합 불량, 권양기에 고철 사용, 서부간선수로의 잠관(潛管) 부실 시공 등이었다.[32]
이에 총독부는 마츠야마와 당시 경기도지사 요네다 진타로(米田甚太郞)를 불러 수차례 대책을 논의하였고, 그 결과 마츠야마 등은 14만 원의 공사비를 내는 대신 형사 책임을 면하게 되었다.[34][35] 총독부는 1927년 8월 27일 공사 개조 명령을 내렸으나[34], 공사비를 조달할 책임자를 두고 미루는 바람에 공사가 지연되면서[36], 실제 공사는 1928년 5월부터 1929년 5월까지 진행되었다.[31]
대한민국
[편집]산업화 시기를 거치면서 일부 복개가 이루어졌다. 복개된 구간은 주로 도로와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37] 복개되지 않은 구간은 직강화 공사가 훨씬 많이 진행되었으며, 콘크리트로 된 제방이 호안을 감싸고 있다.[38]
복원
[편집]현재 굴포천은 1970년대 이후 부평지역의 도시개발사업의 확장에 따라 부평구청 이후 지류 구간이 끊어져 있기 때문에 앞으로 부평 미군부대가 철수하고 재개발사업을 하면 복원할 계획에 있다.[39][40] 2008년 11월, 부평구청 앞부터 인천광역시-경기도 도계까지의 구간을 생태하천으로 복원하는 공사가 준공되었다.[41]
지류
[편집]지류로는 산곡천, 세월천, 청천천, 동수천, 목수천, 돌내, 삼정천, 계산천, 여월천, 귤현천 등이 있다.[3][42]
같이 보기
[편집]참고 문헌
[편집]- 李榮薰 (1992). 《近代朝鮮水利組合硏究》. 서울: 一潮閣. ISBN 8933702237.
- 朝鮮総督府臨時土地調査局 (1911). 《朝鮮地誌資料 京畿道 1》. 京城: 朝鮮総督府.
- 이승자 (2005년 2월). 《굴포천 유역의 지역 환경 변화 연구》 (석사학위논문). 한국교원대학교 교육대학원. 2019년 8월 4일에 확인함.
각주
[편집]- 내용주
- 참조주
- ↑ 가 나 한강홍수통제소 하천정보센터 (2015). 《한국하천일람 2014》 (PDF). 세종: 국토교통부. 98-99쪽. 2019년 8월 11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19년 8월 18일에 확인함.
- ↑ 국토교통부고시 제2016-1050호. 2016년 12월 28일.
- ↑ 가 나 이승자 2005, 17쪽 .
- ↑ 가 나 이승자 2005, 22쪽 .
- ↑ 이승자 2005, 23쪽.
- ↑ 《富平府邑誌》. 京畿. 1698. 2019년 8월 1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9년 8월 18일에 확인함.
- ↑ 《新增東國輿地勝覽 제9권》. 漢陽. 1530.[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임동윤 (2009년 4월 1일). “예전엔 굴포천·직포·대표천으로 나눠 불러”. 인천투데이. 2019년 8월 12일에 확인함.
- ↑ 인천광역시 (2002). “작전선운동 한다리[大橋]와 중앙교(中央橋)”. 《인천광역시》. 2019년 8월 1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9년 8월 12일에 확인함.
- ↑ 홍순민 (1999년 8월 21일). “[우리고장 이야기]살라리 별곡(2)”. 인천일보. 2019년 8월 18일에 확인함.
- ↑ 朝鮮総督府臨時土地調査局 & 1911?, 250쪽.
- ↑ 朝鮮総督府臨時土地調査局 & 1911?, 284쪽.
- ↑ 가 나 이승자 2005, 21쪽 .
- ↑ 가 나 “경인운하는...”. 중앙선데이. 2009년 1월 11일. 2019년 8월 4일에 확인함.
- ↑ 《정조실록》 정조 47권 21년 8월 30일, 채제공에게 명하여 장릉에 숙종 어제운을 차운하여 현판에 걸어놓게 하다. 국사편찬위원회
- ↑ 남동문화원장, 편집. (2010년 3월). 《남동구 20년》. 인천광역시 남동구청(인천신문 제작 대행). 199-201쪽. 2012년 7월 12일에 확인함.
- ↑ 이승자 2005, 24-29쪽.
- ↑ 李榮薰 1992, 68쪽.
- ↑ 가 나 李榮薰 1992, 69쪽 .
- ↑ 李榮薰 1992, 67-68쪽.
- ↑ 도리우미 유타카 (2014년 12월). “일제하 수리조합사업과 일본인 토목청부업자”. 《한국문화》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68): 298. 2019년 8월 1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9년 8월 12일에 확인함.
- ↑ 최병택 (2015년 6월). “경성토목담합 사건을 통해 본 일제하 토목 청부업계의 담합 관행”. 《역사연구》 (역사학연구소) (28): 102-106. 2019년 8월 12일에 확인함.
- ↑ 李榮薰 1992, 69-70쪽.
- ↑ 李榮薰 1992, 70쪽.
- ↑ 李榮薰 1992, 76쪽.
- ↑ 가 나 李榮薰 1992, 77쪽 .
- ↑ 가 나 다 라 李榮薰 1992, 78쪽 .
- ↑ 가 나 李榮薰 1992, 83쪽 .
- ↑ 李榮薰 1992, 79쪽.
- ↑ 가 나 李榮薰 1992, 84쪽 .
- ↑ 가 나 李榮薰 1992, 86쪽 .
- ↑ 가 나 “不正으로一貫 洪水一過에曝露”. 동아일보. 1927년 9월 1일. 2019년 8월 4일에 확인함.
- ↑ “富平一帶의慘災”. 동아일보. 1925년 7월 24일. 2019년 8월 12일에 확인함.
- ↑ 가 나 李榮薰 1992, 85쪽 .
- ↑ “富平水利不正事 改修設計에着手”. 동아일보. 1927년 9월 7일. 2019년 8월 4일에 확인함.
- ↑ “問題의富平水組 改修工事도遷延”. 동아일보. 1928년 1월 14일. 2019년 8월 4일에 확인함.
- ↑ 이승자 2005, 33쪽.
- ↑ 이승자 2005, 36-37쪽.
- ↑ 송정로 (2007년 5월 23일). “굴포천 복원 큰 틀 짜야”. 인천신문. 2019년 8월 4일에 확인함.
- ↑ 송원영 (2016년 6월 27일). “부평 굴포천 복원, 제2의 청계천 만든다”. 한국일보. 2019년 8월 4일에 확인함.
- ↑ 정기환 (2008년 11월 5일). “되살린 굴포천 시민들 품으로”. 중앙일보. 2019년 8월 4일에 확인함.
- ↑ 김청규 (2017년 3월 25일). “‘물’의 고을 부평” (PDF). 《부평사람들&》 (부평구청). 8면. 2019년 8월 4일에 확인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