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격차로 6년 노동당 정권 뒤집기 성공
총선서 경제·중공 침투 쟁점…유권자 심판
뉴질랜드 총선에서 중도우파 성향의 제1야당인 국민당이 승리했다. 전임 노동당 정권의 친중국공산당(중공) 외교정책에 대한 방향 수정이 예상된다.
지난 14일(현지시간) 실시된 총선에서 국민당은 득표율 39%로 6년간 집권한 노동당(27%)을 10% 포인트 이상의 큰 격차로 따돌리며 정권을 탈환했다.
과반 득표에는 못 미쳤지만, 국민당은 9% 득표한 보수 성향의 액트(ACT)당과 연립정부 구성을 위한 협의에 들어갔다며 “일을 해낼 수 있는 강력하고 안정적인 정부를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일 잘하는 정부’는 이번 총선에서 국민당이 내세운 정권 심판론의 핵심이기도 했다. 전임 노동당 정부는 지난 2017년 총선 때 37세 여성인 저신다 아던을 대표로 내세워 승리했고, 이어 2020년 총선 때는 코로나19 봉쇄 정책에 힘입어 재집권했다.
그러나 진보의 상징으로 떠올랐던 아던 대표는 지난 1월 대표직을 사임했다. 다가오는 총선을 승리로 이끌 원동력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지난 3년간 뉴질랜드는 경제 불안, 주택 부족, 생활비 상승 등 침체에 빠졌고, 노동당의 지지도는 급락했다.
CNN은 아던 전 총리가 침체된 경제, 역사적 최고 수준인 6% 인플레이션, 국제 신용평가사들의 우려를 자아낸 정부 재정적자를 후임자에게 물려주고 떠났다고 평가했다.
‘중공의 침투’ 뉴질랜드 역사상 첫 선거 쟁점으로
이번 총선에서는 높은 물가 상승률과 함께 중공의 위협이 주요 쟁점이 됐다. 중공의 위협이 선거에서 쟁점으로 떠오른 것은 뉴질랜드 역사상 최초다.
총선을 두 달 앞둔 지난 8월 10일, 뉴질랜드 보안정보국(NZSIS)은 53쪽 분량의 보고서를 통해 중공 정보기관과 연계된 개인 및 단체가 뉴질랜드의 다양한 중국계 커뮤니티를 표적으로 삼아 은밀한 적대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보안정보국은 “이런 행위는 주로 뉴질랜드 정부를 겨냥한 것이지만, 기업, 연구기관, 정부와 계약한 개인·단체도 대상으로 하고 있다”며 “인맥이나 사이버를 통한 내정간섭, 스파이 활동, 허위정보 유포, 경제적 압박 등이 포함된다”고 전했다.
뉴질랜드는 2018년 인구조사에서 전체 인구 512만 명 가운데 중국계가 24만7천 명으로 5.3%를 차지할 정도로 중국계가 많이 사는 국가다. 중공은 이러한 무시할 수 없는 규모의 유권자 집단을 형성한 중국계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통일전선 공작을 수행해왔다.
통일전선은 공산당이 아닌 세력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전략전술로 정치인 및 지식인 매수, 민중을 상대로 한 여론공작 등이 포함된다. 마오쩌둥은 이를 “중공의 3대 마법무기”라고 칭했고 시진핑 정권에서도 서방을 타락시켜 무너뜨릴 비밀병기로 높이 사고 있다.
뉴질랜드를 겨냥한 중공의 통일전선 공작에 대해서는 뉴질랜드 캔터베리대학의 정치학 및 국제관계학 교수로 재임 중인 앤-마리 브래디 교수가 2017년 ‘마법의 무기, 뉴질랜드에 침투한 중국 공산당’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며 경종을 울린 바 있다.
뉴질랜드에서는 중도보수인 국민당 소속의 중국계 양젠(楊健) 의원이 15년간 중공 인민해방군 군사정보 분야에서 복무한 사실을 영주권 취득 및 취업 시 밝히지 않은 사실이 ‘파이낸셜 타임스’에 의해 폭로됐고 관련 논란으로 2020년 10월 정계를 은퇴했다.
노동당 최초의 중국계 의원인 레이먼드 후오(霍建强) 역시 비슷한 사례였다. 2008년 노동당 의원으로 정계 입문한 그는 공공연하게 뉴질랜드의 중공 통일전선 연계 조직과 함께 일하면서, 중공에 이익이 되는 정책들을 추진해 왔다.
2010년 당시 중국 부주석인 시진핑의 뉴질랜드 방문 때는 중공의 티베트 통치를 옹호하는 글을 블로그에 올리기도 했고, 2011년에는 23억 달러 규모의 교육 정책과 관련해 아시아 지역 유학생 시장을 중시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양젠 의원과 같은 시기에 정계를 떠났다.
이처럼 몇 년간 누적된 중공의 침투에 대한 우려를 바탕으로 이번 총선에서는 중국의 투자가 쟁점이 됐다. 중공의 일대일로 투자 제안을 두고 이를 수용해야 하는지 유권자들 사이에서 우려가 퍼진 것이다.
일단 국민당이 승리한 결과는 유권자들이 중국의 투자가 가져올 경제적 효과보다 국가안보를 중시해야 한다는 선택을 내린 것으로 평가된다.
뉴질랜드 유권자이자 본지 통신원인 올리버 존슨은 “국민당이 선거에서 중공에 강경하게 대응하겠다고 밝힌 것이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전했다.
다만, 차기 신임 총리가 될 국민당의 크리스토퍼 럭슨 대표는 중공의 일대일로 투자를 환영한다고 발언했다가 지지자들로부터 큰 비난을 받은 바 있다.
국민당 의원들은 중공에 강경한 입장을 나타내고 있으나, 럭슨 대표는 경제 협력만큼은 포용적 태도를 몇 차례 내놓은 바 있다. 중국은 뉴질랜드의 최대 교역국이다.
다만, 국민당이 연립정부 구성을 위해 당장 손을 내밀고 있는 보수성향의 액트당은 국민당보다 중공에 한층 강경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또한 국민당이 추가적인 도움을 얻어야 할 야당이자 민족주의 포퓰리즘 성향의 뉴질랜드 퍼스트(NZ First)당은 중공에 대해 더욱 강경한 정책을 주장하고 있다. 이를 종합하면, 국민당의 대중공 정책이 더욱 강한 쪽으로 기울어질 가능성도 제기된다.
한편, 시사평론가 왕허는 “국민당은 이미 오커스(AUKUS·미-영-호주 3국 군사동맹)에 일부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오커스는 중공을 겨냥한 동맹”이라며 “이전까지는 중공이 뉴질랜드의 친중공 정부를 통해 ‘파이브 아이즈(Five Eyes·미-영-캐나다-호주-뉴질랜드 첩보동맹)’에 균열을 낼 수 있었다”고도 지적했다.
지난 6월 뉴질랜드 노동당의 크리스 힙킨스 총리는 중국 공식 방문을 계기로 시진핑과 뉴질랜드-중공 협력 강화 문서에 공동 서명한 바 있다. 이로 인해 미국이 주도하는 파이브 아이즈를 비롯한 서방의 중공 포위망에 부분적으로 틈이 생겼다는 평가가 내려지기도 했었다.
왕허는 “하지만 이제 뉴질랜드 정권이 교체되면서 이런 포위망 균열 내기가 더는 가능하지 않게 됐다”고 평가했다.